우리문화
AI가 장면을 만들 때, 감독은 영화를 만든다
한국 영화계가 인공지능(AI)을 만나 상상력의 무대를 넓히고 있다. 거대한 벌레가 등장하는 출근길 지하철부터 조선의 요괴와 서양 흡혈귀가 맞붙는 세계까지, 촬영과 제작비의 제약으로 구현하기 어려웠던 이야기가 스크린을 향한다. 기술 자체를 볼거리로 내세우던 초기 실험과 달리, 최근에는 감독의 개성과 배우의 연기를 결합한 작품들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11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아시안 콘텐츠&필름 마켓(ACFM)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프로젝트들이 공개됐다. ‘서울의 봄’을 연출한 김성수 감독은 첫 AI 단편 ‘웜 트레인’을 소개했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은 만원 지하철의 회사원이 거대한 굼벵이로 바뀌는 상황을 그린다. 익숙한 도시 풍경에 비현실적인 존재를 끌어들인 설정이다.
김 감독에게도 구현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제작 초기에는 벌레가 인파에 파묻힐 때의 무게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이후 새로운 영상 생성 모델을 시험하고 소규모 팀을 구성하면서 작업을 이어갔다. 오랫동안 품어온 구상이 기술 발전을 계기로 구체적인 장면으로 옮겨진 셈이다.
장편에서도 판타지 장르의 시도가 눈에 띈다. 제작사 클라이맥스가 발표한 안재홍 감독의 ‘원소’는 초능력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정충근 감독의 ‘요괴전’은 조선을 위협하는 서양 흡혈귀에 한국 전통 요괴들이 맞서는 이야기를 담는다. 제작사는 AI 분야에서 활동한 신인 감독을 발굴하는 한편, 대중적 인지도를 갖춘 배우들의 출연도 추진할 계획이다.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는 작품도 늘고 있다. AI SF 장편 ‘스틸레이’는 오는 2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문근영·고아성·김시아 등이 출연하는 연상호 감독의 미스터리 스릴러 ‘예토’는 내년 개봉을 목표로 후반작업 중이다. 강윤성 감독도 변요한 주연의 AI 액션 영화 ‘아덴만’을 제작하고 있다. AI 활용이 특정 형식에 머물지 않고 여러 장르로 확장되는 모습이다.

이 같은 변화는 영화 창작에서 인간의 역할을 다시 묻게 한다. 부산영화제에서 감독들이 강조한 것은 장면을 생성하는 능력과 영화를 연출하는 능력의 차이였다. 개별 화면의 완성도가 높아져도 무엇을 보여주고 어떤 순서로 배치할지, 장면 사이에 어떤 감정을 남길지는 창작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기술의 진전과 함께 평가의 무게중심도 이동할 전망이다. 인물의 일관성과 움직임이 개선되고 실사와의 경계가 옅어질수록, 관객에게 중요한 것은 제작 방식보다 작품이 주는 재미와 울림이 된다. AI가 영화의 새로운 수식어로 남을지, 촬영과 편집처럼 자연스러운 제작 도구로 스며들지는 앞으로 공개될 작품들이 보여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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